사업을 하는 이유

2023. 12. 21. 10:20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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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하는 이유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합니다. 그런데 왜 사업을 하느냐는 질문에는 그렇게 멋진 대답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돈을 벌고 잘 먹고 잘 쓰고 가족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데 주안점이 머뭅니다. 그리고 그럴싸한 이유를 말하는 사람도 그의 삶에서 그런 이유에 합당한 삶을 찾아보기는 힘들었습니다. 필자가 스물 셋 되던 해에 어른의 비즈니스 여행에 따라간 적이 있었고, 첫 기착지였던 일본에서 동경대 교수님과 했던 대화가 기억이 납니다. 그 교수님은 제게 무엇이 사업을 영위하게 하느냐?”는 질문을 하였고 저는 신뢰일 것 같다는 대답을 하였고 그 교수님은 이다라는 관점에서 한참 토론을 벌였었죠. 사실 둘 다 매우 주요한 사업의 핵심이지만 나름 저의 생각으로 주장을 펼쳐본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소싯적에 우리나라는 참으로 가난했고 필자는 이 나라가 부국(富國)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의 남아로서 태어나 보람있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업가로서 꿈을 키우며 제 자신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래서 대학도 상대를 갔고 대학원도 MBA 과정을 공부했죠. 더 많은 공부의 욕심도 있었지만 이를 제쳐두고 현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필자는 부친께서 1976년도부터 섬유제직, 염색가공, 수출회사를 경영하고 계셨고, 1989년부터 새롭게 건설회사를 성장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경영자로서의 길을 가면서 섬유 수출과 아파트 단지 기획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되었죠. 저의 기억에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대구의 다섯 군데에 소재한 섬유 공장의 구내 식당에 식탁과 의자를 교체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사를 전체적으로 돌아보고 나서 힘들게 일하는 직원들이 식사를 할 때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휴식을 취하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후에도 일을 하다가 나태한 생각이 들면 섬유공장으로 가서 직원들과 함께 땀을 흘리거나 건설 현장의 가장 힘든 곳에서 직원들을 격려하면서 보낸 기억이 있습니다. 필자는 사업을 하시던 부친 덕분에 돈 걱정 없이 공부하였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배우고 누렸으니 이를 돌려주기 위해, 또 이 나라가 부국해 지는데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이 직원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면서 더욱 굳건히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필자가 사업을 하면서 겪은 독특한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할 까 합니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던 국가 부도의 위기에서도 필자가 경영하던 회사는 굳건히 살아 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참 많은 기업이 도산하였고 법정관리다 워크아웃이다 하면서 기라성 같던 회사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대안을 찾기 보다 정공법으로 회사를 꾸려 나갔습니다.  회사의 원로들은 우리도 워크아웃을 신청해야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타진하셨지만 저는 이 난관을 이겨내면 좋은 날이 올 것을 확신하며 앞만 보고 뛰어갔습니다. 사실 지방에서 IMF의 위기 상황을 감지하지 못했던 저희 회사는 사태가 발발하기 직전에 약 350세대에 달하는 아파트 분양을 시도하였고 모델하우스 오픈 후에 IMF 사태가 터져 계약율이 저조하였습니다.  그래도 위치가 좋은 곳이라 약 150여 세대가 계약을 마쳤었는데 날이 갈수록 올라가는 대출이자는 회사의 존립을 예측할 수도 없었고, 계약자들이 연리 40%가 넘는 천정부지의 이자를 감당하면서 중도금을 납입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 결국 우리는 계약자들이 우리 회사가 잘 못되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는 것을 막고자 계약금을 반환하는 결정을 내렸었습니다.  단 한 푼의 돈이 귀할 때지만 우리 회사를 믿고 계약해 준 분들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알기에, 회사는 없어지더라도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와 부친의 확고한 생각이었죠.  결국 계약금을 돌려드리고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분양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돈을 다 돌려드렸지요.  몇 명을 제외하고는 참으로 고맙게 계약금을 돌려받아 가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 당시에는 대한주택보증의 업무가 지금처럼 민완하게 처리되지 않아서 건설사가 부도나면 그 고통을 입주 예정자가 고스란히 떠맡게 되어 있었죠.  그리고 저는 해외로 섬유 수출을 하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귀국하여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해외의 각 시장이 판매되는 아이템이 다르므로 샘플을 바꾸는 시간이었고, 2년을 정신없이 뛰었고 원화 환율의 평가절하로 인해 한동안 많은 양의 수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뛰어다닌 보람으로 회사는 다시 안정을 찾게 되고 2년 전에 계약금을 돌려주었던 아파트 단지도 다시 분양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 꿈같은 시간이었고 보람 있는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는 한동안 승승장구하게 되었습니다.  건설사의 속성상 일이 풀려나가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기억에 남는 두 가지의 일을 매우 보람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대구시 동구 효목동에 위치한 1,859세대의 아파트를 완공한 일입니다.  그 아파트는 대구의 유력한 건설사가 재건축사업으로 수주하여 진행을 하다가 IMF 사태로 인해 부도가 나고, 수지가 맞지 않는 구도로 인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고 현장이었죠.  그 단지는 약 1,400여 조합원 세대가 이주를 기다리며 5년 이상 오갈 데 없이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그 현장은 인근 K2 군사 공항으로 인해 고도 제한이 있었는데 수주한 회사가 계획을 잘 못하여 적자 현장으로 알려져 있었죠.  그런 현장을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시장님과 구청장님의 부탁을 접한 저의 부친은 회사 임원들과 상의를 하였고, 모든 중역들은 수주를 반대하였습니다.  이익도 낼 수 없고 또 500여 세대에 달하는 일반 분양도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수지가 맞지 않는 부분을 일반 분양분에서 수지를 맞추어 성공적으로 해내면 갈데 없이 떠도는 1,400여 가구의 줄 잡아 5천여 명의 사람들이 행복해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뜻을 부친께 말씀드리니 크게 반가워하시며 이 일을 추진하자고 하셔서 결국 분양도 성공하고, 조합원들이 내 집을 되찾는 기쁨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한 동안 여러 사람들로부터 치하의 말을 들은 것이 지금도 기분 좋게 느껴집니다.  이익만 따졌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이상의 가치를 느껴본 것이지요.

 

   또 다른 사례입니다.  하루는 사무실에 있는데 한 지인이 찾아와서 대구 시지에 있는 장애인 시설을 이전하고 아파트를 건립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얘기는 현재 부지 상태에서 토지의 이용 계획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 것이므로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저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토지 이용 계획의 수정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고 된다고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서 그 사람의 얘기처럼 될 리는 만무한 것이었죠.  그러나 저는 현장에 가 보자고 하였고, 현장을 둘러보니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 장애우들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어림잡아 생각해 보니 이 시설을 다 옮겨주고 장밋빛 청사진처럼 되지 않으면 약 100억원 정도를 희사하면 되겠구나 하는 판단이 섰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일을 하겠노라고 하고 어른께 최종승인을 받아야 되니 좀 기다려 달라고 하였죠. 본사로 돌아와서 어른께 말씀을 드리니 로타리 지구 총재를 지내실 때 가 보신 적이 있다고 하시며 시설의 낙후함을 익히 알고 계셨고, 쾌히 저의 의견에 동의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빠른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익을 따지는 접근법이 아니라 사업을 통해 얻은 이익을 사회를 위해 쓰겠다는 일념의 발로였던 것이죠.  그 일은 천신만고 끝에 잘 마무리가 되어 지금도 팔공산 자락에 세계적인 시설로 인정받으며 장애우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있음에 가슴 뿌듯함을 느낍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많은 결정을 해야 하고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결정이 회사의 존망이 걸려 있는 문제 일 수도 있고, 단순한 선택에 관한 문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결정을 내리는 가의 문제는 경영자철학가치관이 어디에 있느냐는데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업의 목표가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오로지 만 쫓아가는 장사치들도 있지만 ‘돈’만 움켜쥐려는 사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우리 회사의 그늘 아래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참 많은 사람들이 어려울 때 손을 내밀고 도움을 받았었지요.  지금도 생각하면 수 천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를 경영하다가 법정관리의 쓰디쓴 길을 갔지마는 우리 회사로 인해 단 한 개의 회사도 도산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회사가 없었음은 참 드문 예가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법정관리를 신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명박 정부가 건설회사를 등급을 매겨 수많은 회사가 억울한 도산의 길로 내몰리는 최악의 정책과 비 오면 우산을 뺏어가는 잘못된 금융관행 속에서 신한은행이라는 최악의 기관과 PF금융을 하면서 시공사로서 책임준공이라는 족쇄를 찬 이유가 있었던 것이예요.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최선 이상의 노력을 다하였고, 모든 책임을 저희 부자가 고스란히 다 지고 개인적 재산을 모두 회사에 헌납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날의 얘기를 더 적을 것도 없고 회상해 본들 돌이킬 수도 없지만 이제 와서 보면 필자의 부자로 인해 도움을 받아 사업을 살리고 일으키고 부흥시킨 수많은 자들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왜 사업을 하는지, 무엇이 그들의 가치인지 반문해 보고 싶기도 합니다.

 

   세상에 철학이 없고 중심이 흔들려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 모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삶을 망쳐버리는 자가 되지 않기를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이 사업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사업의 안정과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이 궁극의 종착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업에는 분명한 가치를 지니는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업을 하면 얻게 되는 많은 성공한 사람들과의 교제 속에서 각자가 쌓아온 삶의 진수를 나누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부자 나라가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갈 바 몰라 헤매는 것을 직면하게 됩니다.  필자는 그대로 방치하면 도저히 천국을 경험할 수 없는 영혼들을 위해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일에 사업을 통해 효과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바라며 다시 사업의 꿈을 꾸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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