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27. 09:22ㆍ카테고리 없음
大學에서 알 수 있는 기독교의 진리 - 대학의 3 강령에 대하여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의 국민들 정서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유학의 가르침을 통해 흐르고 있는 맥을 잡아서 기독교의 진리를 알게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국민들은 교과서를 통해서 또는 선각들의 말씀 속에서 유학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그러므로 윤리적 철학적 기초가 유학의 말씀에서 부지불식 간에 형성되게 됩니다. 필자 역시 어려서 선조부와 가친의 영향으로 한서들을 일찍이 접하게 되면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유학의 가르침에 발을 단단히 딛게 되었었습니다. 유학의 사서삼경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흔치 않으나 주자학의 영향과 조선시대의 정책으로 인해 사서의 몇 구절 정도는 국민 모두가 들어 봤음직 합니다. 또한 교회의 번성기를 통해 미션 스쿨이나 전도지 또는 매체를 통해 기독교의 가르침 또한 우리 국민들의 뇌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죠. 그래서 우리 국민의 정서를 바탕으로 ‘사서’의 가장 선행되는 책인 ‘대학’과 기독교의 본질을 전하는 ‘성경’을 함께 고찰하여 봄으로 진리를 향해 다가서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필자는 유학이나 신학의 전문가도 아니고 어느 한 편에서 내세울만한 공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이 보잘 것 없는 글이 유학을 깊게 공부하신 분들이나 신학의 많은 학자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이러한 시도가 읽는 이로 하여금 진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나아가 많은 이들이 진리를 바로 알게 되길 바랄 따름입니다.
‘사서’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이 용어는 중국 송나라 때 ‘주자’라는 분이 수 많은 유학의 책들을 엄선하여 세상의 본질과 진리를 전하는 소위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주창하면서 네 권의 책을 뽑아 ‘사서’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이렇게 네 권이 성리학의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책이 된 것이지요. 그 중 ‘대학’은 ‘예기’라는 책의 일부분으로 그 당시 불교문화에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 인간 삶의 도리나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차원을 넘어서 뭔가 새로운 시대 이념을 끌어낼 수 있는 단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불교는 당나라 시대에 달마대사가 전함으로 귀족들로부터 시작해서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종래의 유학에서 찾아볼 수 없던 내세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었나 봅니다. 유학적 관점에서 죽음은 후세에 의해 추모되는 대상일 뿐 죽은 후의 세상이 따로 존재하여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뒤에 천당과 지옥으로 대변되는 여섯 개로 나누어지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이런 윤회의 고리를 깨고 나오면 위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한 뭔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과는 관계없이 ‘관세음 보살’만을 반복하고 덕행을 쌓으면 부처가 되거나 내세에 천당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 당시 매우 파격적인 제안일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문명이나 사상 또는 종교도 처음 접하게 될 때에는 신선한 무엇인가를 던져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근본을 가리는 인간의 정욕과 권력과의 야합으로 악취를 내게 되지요. 당시 중국에서의 불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절이 커지고 승려의 사치가 심해지고 부처상에 금이 입혀졌답니다. 불교의 절은 권력의 중심이 되고 승려들은 세속의 부와 권력을 함께 얻게 되었습니다. 윤회를 이용하여 결국은 혹세무민하게 되었던 것이죠.
이러한 시대적 바탕 위에 허상과 본질을 구별할 수 있는 지력을 가진 지식인들 사이에서 다시 세상의 본성과 진리를 찾아 ‘궁즉통窮則通’의 주역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 ‘성리학’입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답이 있다는 것이고, 문제 의식은 답을 부릅니다. 내세의 환상에서 인간을 구해낼 새로운 인본주의 문명을 이끌어 갈 지도자의 리더십을 ‘대학’에서 찾았고, 새로운 지도자의 삶의 방식을 ‘중용’에서 찾아내었습니다.
‘대학’의 가르침을 요약해보면 3 강령인 명덕, 신민, 지선(明德, 新民, 至善) 과 8조목인 격물치지, 성의, 정심,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 (格物致知, 誠意, 正心, 修身齊家 治國 平天下)입니다. 대학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하고 재신민(在新民)하고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니라.’
첫 번째 강령, 명명덕(明明德)! ‘대학의 도는 즉, 큰 배움의 진리는 밝고 밝은 덕에 있다’고 합니다. ‘덕’이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위대한 선천적인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덕’이 있다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우주로부터 품부 받은 인간으로서의 위대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덕을 가만 놔두면 안 되고, 내 안에 있는 위대한 ‘덕’을 밝혀 주변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과 수양을 통해 이 ‘덕’을 계발하고 구현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에서 ‘덕’은 진리를 의미하지요. 밝은 진리를 찾아 그것을 드러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스스로 찾고 스스로 계발하고 스스로 드러내야 합니다.
여기서 성경의 말씀을 보시지요. 저는 대학의 첫 구절 단어에서 ‘명’ 이라는 글자의 깊은 의미를 발견합니다. 왜 같은 글자를 두 번이나 반복하였을까?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를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시면서 가장 먼저 암흑의 세상에서 빛을 만드셨습니다. 암흑의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고 아무런 것도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빛’은 밝음이고 ‘밝음’은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지요. 감추임이 없는 드러남을 전제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또한 성경의 한 권인 요한 일서에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라고 하였고, 시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 배움의 도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이미 답이 나와 버렸죠. 하나님은 조금도 숨김이 없으신 ‘빛’이시고, 그 자체가 ‘진리’이심으로 하나님에게서 큰 가르침을 얻어야 합니다. 제가 보아 온 선각들은 평생 진리를 찾아 인생을 다 보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한계를 느껴 세상을 등지거나 정신이 이상해지는 이들도 있었죠. 니체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사실 많은 철학자들이 말년에 정신이상 증세를 호소한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진리’이신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피력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고, 대신 유사 이래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을 한 번만 읽어 보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세상에 태어나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단연 성경을 읽으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짧은 지면을 통해 한 마디로 하나님이 왜 진리이신지 정의하자면 ‘하나님에게서는 어떤 과오나 어둠에 숨겨진 비밀이 없으신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공명정대하심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할게요.
두 번째 강령 신민(新民), 나 혼자만 밝히지 말고 주변 사람들을 새롭게 하고 함께 혁신하고 함께 변화하라는 것입니다. 큰 배움의 도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크게 자각하고 진리를 배워서 사람들을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무엇인 줄 아시나요? “가서 전하라”입니다. 제자들이 보고 배우고 알게 된 것을 자신만 만족하지 말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알게 하여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진리’는 혼자서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알고 더불어 실천함으로 그 의미를 더 하는 것이니까요. 진리가 선포만 되고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 의미가 퇴색될 것이고, 진리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아무런 이유가 없으셨을 수도 있겠죠. 하나님은 공자님이 깨우치신 ‘신민’의 의미를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몸소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뭔가를 깨우치기 위해 상당히 오랜 시간을 고뇌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미 우리가 깨우쳐야 할 모든 진리와 도리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다만 인간은 자신의 언어로 또 자신의 한정될 수밖에 없는 지식과 두뇌로 성경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더 나아 보이려고 하는 교만한 생각을 떨치지 못함으로 헛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진리의 말씀을 더불어 나누고 실천함으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강령, 지어지선(止於至善). 지극히 선한 경지에 머물러라. 혹자는 지극히 선한 세상을 바로 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만들어내라는 의미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글을 배울 때 우리의 삶이 큰 배움을 통해 선을 행하고 행하여 그침(부족함)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공자는 천국의 개념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었으므로 이를 두고 이 땅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위대한 선을 창조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패가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큰 배움을 얻어 우리의 삶이 ‘선’의 결정체가 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죄성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죄를 짓고 살게 되지요. 흔히 죄라고 하면 살인, 강도, 도둑질, 거짓말 등을 생각하지만 실제 죄는 시기, 질투, 탐심, 정욕, 교만처럼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말로도 짓게 되죠. 이러한 죄성을 가지고 우리가 큰 배움의 도를 깨우치고 나면 과연 ‘지극한 선’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곳에 우리의 선행으로 들어가려면 온전하신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해야 하는데 이 세상에는 그 표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노력뿐만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한 생활을 하고, ‘지극한 선’이 있는 ‘천국’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인간이 살아서 치를 수 없는 죗값을 치르심으로 인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된다면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를 해 보면 ‘대학의 도, 큰 배움의 도리는 밝은 진리를 밝히는 데 있고, 이를 배워 사람들을 새롭게 하고, 선을 행함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라는’ 것인데 기독교에서는 유학이 설파하는 추상적인 진리를 하나님에게 고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라고 확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다른 이들에게 전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맞는 복된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배워 실천하고자 노력하지만 죄 많은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지극한 선’을 하나님의 분신인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믿고 ‘지극한 선’의 세계인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땅에서 경험하게 되므로 ‘지극한 선’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부족한 저의 글로나마 조금이라도 믿지 않는 분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써 보았습니다. 다음에는 대학의 8조목과 성경을 살펴보도록 할게요..
2017. 7. 29.
희망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