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삶

2023. 12. 30. 08:44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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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삶

 

청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관념의 세계에 자신을 가둬 두지 말고 해야 할 일, 유익이 되는 일을 실천하라는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집을 지었다가 부술 수도 있고, 말로는 맨해튼의 빌딩을 살 수도 있고, 말로는 온갖 선한 일을 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하는 현실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하루에 집을 지을 수도 없고, 세계에서 가장 비싼 뉴욕 맨해튼의 빌딩을 소유하는 것이 쉬울 리도 없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집을 짓고, 빌딩을 사고, 선행을 베풀 수 있을까요?

 

행동이고 실천입니다.  생각에 머무르거나 말로만 하지 말고 움직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잘 살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잘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부자로 사는 사람 또한 소수에 불과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부자의 개념과는 다른 것을 잠시 언급하자면 돈이 많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니지요.  돈을 많이 가져 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그의 삶이 보편타당한 기준을 벗어나 있거나 왜곡된 가치관으로 그 삶이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면 결코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부자의 삶이 존경 받는 삶이 될 때 그가 비로소 잘 사는 삶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은 후일 다시 얘기해 보기로 하고, 잘 살거나 부자로 사는 것은 모든 이의 소망인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렇게 살지는 못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그것을 두 가지 이유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첫 째는 잘 못된 생각이나 가치관으로 기인하여 삶의 중심이 흐트러져 있는데 연유하고, 둘째는 실천이 따르지 않는 생각 속의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필자의 다른 글에서 우리의 생각, 가치관을 확고히 하여 삶의 중심을 잡아 나가야 한다는 것은 누차 강조한 바가 있으니 오늘은 실천적 삶의 중요성을 중점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어떠한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고, 개선의 여지가 있다면 즉시 행동에 옮겨 실행하는 것이 잘 사는 길로 가는 첩경입니다.  핑계나 변명을 찾아 실행을 늦추거나 타성에 젖어 개선을 유예한다면 그의 삶이 잘살기 위한 길에서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학교나 조직에서 열심을 다해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학교를 예로 들자면 학생들은 모두가 공부를 잘 하고 싶겠지요.  그런데 공부를 잘 하는 학생과 잘 못하는 학생이 있죠.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공부를 하는 행동을 실천해 나간 결과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을 뿐이지 제대로 공부하는 행동을 꾸준히 실천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조직에서도 인정 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책무를 알고 그 분야에서 만족할 결과를 얻기 위해 꾸준히 고민하면서 노력하고 몸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살아가게 되고 다른 사람을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실천하는 노력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한 순간의 횡재로 우리의 삶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꾸준한 실천만이 우리의 삶을 잘 사는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말을 그럴싸하게 한다고 해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입으로는 진리와 정의를 얘기하고, 감사를 얘기하고 배려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실천하며 살고 있을까요?  진리와 정의를 얘기하면 너무나 큰 개념이어서 선뜻 다가서기 힘든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먼 곳에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문제, 놓쳐서는 안 되는 지극히 상식적인 가치,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진리이고 정의라고 하면 좀 가까운 느낌이 드나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 형제 자매와 잘 지내는 것, 친구들과 의리를 지키는 것, 거짓말 하지 않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것, 나보다 어렵거나 약한 사람을 돕는 것, 이 모두가 정의롭고 진리인 삶의 단편이 아닐까요?  사실 제가 느끼고 알게 된 진리는 성경에 모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고 이 글에서 성경의 진리를 모두 피력하기는 힘들지만 상기한 몇 가지의 언급 또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임을 밝힙니다.  아마도 상기한 예시를 진리와 정의의 관점에서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진리와 정의를 얼마나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에 다가서게 되면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게 된다면 당신의 양심은 살아 있다고 느껴도 좋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경의 십계명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인간의 전통적 윤리체계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반드시 실천해야 할 덕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이것을 잘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흔히들 보게 되는 모습이 대학이나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분가한 후에는 명절이나 그저 일 년에 몇 번 정도 겨우 얼굴을 내 비치고, 전화 한 통 삐죽하는 것이 자신을 나으시고 기르신 부모에 대한 애정의 표현의 전부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 갖은 고통과 더할 수 없는 사랑을 아끼지 않으신 부모님을 향해 자식으로서 돌려 드릴 수는 없지만 보은 하는 모습이 이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에게 쏟는 애정의 반의 반만이라도 부모님께 돌려 행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전화 한 통, 그저 얼굴 한 번 삐죽이 내미는 것은 내가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한다는 실천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형제 자매간,동기간에도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내 것을 나누는 작은 사랑의 실천이 몸에 베이려면 가족 간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동기간의 사랑과 용서가 없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기본이 틀려져 있는 것입니다.  한 부모님 아래서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뒤틀려서 서로 반목하고 사랑할 수 없다면 어떠한 사람을 만나도 사랑을 온전히 실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동기간에도 용서할 수 없고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면 아예 다른 사람을 실천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성경에도 보면 형제의 잘 못은 끝없이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형제가 잘 못을 저질렀을 때 일곱 번 그 죄를 용서하면 될까요?” 라는 제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 일곱 번이 일흔 번까지 하라”라고 하셨지요.  용서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용서의 실천을 가족과 동기간에서 실천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용서에 관한 또 다른 예화입니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데 이를 한 마디로 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공자는 즉답하기를 용서할 서()이니라하였지요.  용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품고 살아야 할 가장 귀한 중심 사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너()라는 뜻을 지닌 글자 아래 마음()이 있습니다.  상대의 입장이나 생각 아래 나의 마음을 둠으로써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면 결국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용서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공자님은 서(恕) 자를 풀어서 다시 어질 인(仁) 자와 참을 (), 두 글자로 인간의 도리를 설명하시지만 여기서는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영어로 써보면 Forgive, 누굴 위하여(for) 주는 것(give)이 용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이 가진 것을 줄 수 없고 내가 가진 것을 줄 수밖에 없죠.  나의 마음을 주는 것이 용서인데 이것은 동기간에 가정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세상에서 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는 세상, 이해가 없는 세상, 얼마나 각박하고 참혹할지 상상해 보십시오.

 

친구 간의 의리를 지키며 사는 삶 또한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제가 친구 간이라고 썼지만 사실 의리(義理)는 인간이 지켜 나가야 할 가장 근본적인 도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리(義理)가 무엇인가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도리이며,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켜야 바른 도리입니다.  그런데 의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경험할 있습니다.  인간은 간사하고 나약하여 의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이 드물고 자신의 목전의 이익을 위해 의리를 저버리는 자가 너무도 많습니다그래서 옛말에 친구 셋을 얻으면 세상을 얻은 것과도 같다는 말이 있나 봅니다.  세월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어도 언제나 겸손한 모습으로 우정을 더해가고 의리를 지켜내는 친구들이 있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친구였던 사람들이 언제나 마음 한편을 못내 아쉽게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속에서 의리를 굳건히 지켜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감사함을 표현하고 은혜를 갚는 일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입고도 그것을갚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 너무도 흉물스럽습니다.  감사함은 말로만 표현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따른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이 입은 은혜에 대해 반드시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짧은 삶을 통해서 참으로 보지 말고 겪지 말았어야 들을 많이도 겪은 같습니다.  아마도 사업을 크게 하다 보니 다양한 일들이 곁을 많이 스쳐 지나간 같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고 평생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형에게, 삼촌에게, 등을 돌리는 자도 보았고, 적대적 주식 매집으로 회사가 완전히 남의 손에 넘어가는 와중에 회사의 주식을 사서 1 주주가 되어 방어를 해주고, 지인들로 하여금 수많은 우호 주식을 보유하게 하여 회사의 경영권을 지켜나가게 해준 분을 언제 봤냐는 듯이 내팽게치는 자도 보았습니다.  집을 마련하고 모든 경제적 여건이 자리 잡도록 도와준 이에게 여건이 변하자 연락을 끊어 버리는 자도 보았고, 평생을 얻어먹다가 자신이 형편이 나아지자 아무 없이 연락을 두절하는 자도 경험해 보았습니다. 

 

감사해야 할 일을 이토록 무참히 짓밟아버려도 되는 것일까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 따위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고마웠다. 예전에 나를 도와주고, 있게 하고, 살려 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돕겠고, 은혜를 갚겠다.’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요. 유한한 인생살이를 참으로 팍팍하게 하는 자들의 모습이랍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저만 경험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들이 이런 모습을 지니니 근본을 따져보고 사귐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충고드립니다.

 

반면에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필자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에게 대접을 하였지요.  그중에 아직도 친구로, 선배로, 후배로서 저를 응원하고 따뜻한 말과 도움을 주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고위공직자로서 대구에서 일년을 근무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와는 지인의 소개로 만나서 일년간 달에 번쯤 식사를 하였지요.  그분은 만남에서 제게 위안과 용기를 주시면서 술자리는 허다하고 많이 해봤으니 우리는 번씩 식사하면서 담소나 나누자고 하셨죠.  그래서 주로 양식을 먹으면서 포도주를 곁들여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일년이 다되어 전근을 가시게 무렵 제안하시기를 당신이 떠날 날이 다가오니 다음 달에는 함께 식사를 나누던 분들에게 우리가 포도주를 병씩 가져 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이 되어 모이는데 그분은 제가 알고 있는 최상급의 와인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스페인산 와인으로 최고가의 와인이었죠.  당신은 전에 스페인에서 선물을 받은 것인데 같이 마시면 좋을 같아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재기가 넘치시고 배려가 남다르셨지만 병의 와인은 식당을 꽃밭이 되게 하였고, 대화를 하는 중에 입에서 꽃잎이 풀려져 나오는 경험을 하였답니다.  최상의 와인을 최상의 인격자와 함께 나눈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세월이 흘러 그분은 서울의 대형 법무법인의 대표가 되시고 저는 촌부의 삶을 살고 있던 어느 그분의 음성이 그리워 전화를 드렸더니 너무도 반갑게 근황을 물으시고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날짜를 받아 찾아뵈었더니 어떻게 아셨는지 저를 위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식당을 예약하시고 환대하셨습니다.  병의 와인과 함께 옛일도 회상하고 미래도 그리면서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누었죠.  그리고 제게 당신이 쓰신 책도 선물해 주시고, 지금도 매주 월요일이면 그분의 편지가 저를 일깨워 주십니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대단할 없는 대접을 하였을 뿐이고, 다만 그를 흠모하는 마음이 컸을 뿐인데 그는 자신이  받은 대접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제게 갚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말이나 떠벌리고, 교언영색하면서 순간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익은 포도주가 지니는 풍미를 내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안겨주는 그런 삶을 사시겠습니까?  인간은 어떻게 살아도 유한한 삶이 정해져 있습니다.  속에서 욕망에 사로 잡혀 구린내 나고, 목전의 이익에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떠난 자리에 언제나 인간의 구수한 향기가 묻어 나올 있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런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겉치레 말의 향연이 아닌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 보일 있는 실천의 삶이 절실합니다.  보다 못한 사람, 보다 어려운 사람을 향한 구제의 손길, 내가 입었던 은혜를 인색하지 않고 넉넉히 갚아 있는 실천이 따르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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