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망했는가?

2024. 1. 1. 13:16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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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의 고찰 1.

조선은 왜 망했는가?

 

나라 안 밖이 참으로 시끄럽고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소용돌이 치는 정세 가운데 이 작지만 부유한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의 얘기를 듣던 중 무단히 이 나라의 근대사를 재조명하면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필자가 교회에서 섬기는 영어 청소년부의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고, 저의 딸들과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며 깨닫게 된 것이 우리나라의 역사 교육이 참으로 잘 못 되어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필자가 받은 역사 교육도 시대별 연도별 사건 중심의 역사 수업과 막연히 되풀이되던 암기 위주의 수업 가운데 집단적 세뇌에 빠져 지내던 시간들이 길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얼마나 잘 못 된 역사 인식 속에서 살아왔는지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스스로 책을 읽고 의구심을 가지며 상식적으로 이성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으려 했다면 아마 지금도 청소년기의 막연한 역사관 속에 빠져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역사관이란 역사에 대한 의식 즉, 역사적 고찰을 할 때의 일반적 관념을 가리키죠. 과거의 사실을 볼 때 자신의 고유의 입장, 과거의 사실 가운데서 어떤 사실을 선택할 때의 기준, 그것을 해석할 때의 해석 원리, 그 사실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가치관 등,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을 역사관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바른 역사관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 드물게 보여지는 것은 개인의 지적 능력 배양에 등한시 한 나머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통일성이 결여되고, 단순한 사실의 집적(集積)이나 연대기(年代記)에 머물게 되는 것 이상의 수준을 넘어서기 힘든 까닭일 것입니다.

 

바른 역사 관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로 말미암아 세계관이 결정되어지고 이에 따라 인생관이 자리 잡는다는 데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의 근저에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의 세계관을 말하며, 그 세계관을 형성하는 기초가 바로 역사관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식은 인간의 지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가치관을 결정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인간의 가치관은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곧 어떤 인 생관을 가지느냐는 것이며, 어떤 인생관을 가지느냐는 것은 곧 어떤 세계관을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역사관과 세계관은 별개가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바른 세계관은 세상을 구할 수도 있지만 삐뚤어진 세계관은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근대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관을 바로 잡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입니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이지만 되풀이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역사를 상고해 봄으로써 같은 잘 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고, 이 세계는 혼자서 살 수 없는 곳이므로 서로의 필요에 따라 적정하게, 물론 이것이 거의 강자의 논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협상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구한말 서민들의 삶

 

구한말 조선을 바라본 '긍정의 눈' / 스웨덴기자 아손 그렙스트

 

먼저 '우리나라는 왜 식민통치를 당하게 되었는가? 조선은 왜 망했는가?' 라는 질문을 해 봅니다. '누가 이 나라를 그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많은 한국인들은 이완용을 떠 올리 고, 조금 더 역사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을사오적을 상기합니다. 과연 이것이 정답일까요? 그들이 1905년에 을사조약에 서명을 한 것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의 이양이라는 결과를 낳고, 1910년 한일 합방이라는 국권 포기로 이어졌는데 전쟁도 없이 총 한 번 못 쏘아보고 나라를 넘겨준 것이 매국노라고 불려지는 몇 사람의 행위에 의한 것일까요? 나라가 무슨 부동산 같아서, 아니면 어떤 회사 같아서 한 장의 계약서로 넘겨줄 수 있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 한말이라고 불려지는 조선의 말기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무능하고 병약했던 철종이 1862년 승하하고 이듬해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합니다. 즉위 후 10년간의 대원군의 섭정이 이루어지죠. 세계열강들은 교역을 하자, 수교를 하자며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것을 요구하지만 대원군은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라고 불린 사건을 겪고 나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고집하며 더욱 문을 걸어 잠그기에 여념이 없었지요. 그러나 1873년 비로소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 씨의 척신 정치로 점철되고 맙니다.

 

민비와 대원군 

 

잠시 조선 500년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그러하듯이 왕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계략과 이합집산으로 사화(士禍)가 이어지고 끊임없는 외세의 공격에 조선은 부강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죠.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세요. 조선의 역사 중에 세종의 한글 편찬 이외에 백성을 잘 살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어떤 정책이나 노력이 있었는지?  책을 읽지 않고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도 왜곡을 거듭하는, 그래서 지극히 미화하거나 거짓으로 짓밟아 버리는 드라마 속에서 도대체 성군의 모습, 행복한 민초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구한말 의병

 

민초라는 표현이 가슴 아프지만 백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끼니를 때우기 힘들었고, 반상(양반과 상민)의 계급으로 인해 약 5% 의 양반이 배를 불리기 위해 중인이나 노비는 처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죠. 구한말의 선각자 황현 선생이 남긴 ‘매천 야록’이라는 책을 보면 수 백 건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가슴을 시원케 하는 대목을 찾아보기 힘들지요. 또 예전에 읽었던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비치는 임진왜란 당시의 백성들의 삶이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답니다. 밥 한 끼 제대로 먹기 힘들었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상황을 이용해 나가는 생활상을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사건과 더불어 분통해하기도 하였지요.

 

대의도 없고 진리도 없는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의 삶들과 왕위를 지키려는 최고 통수권자의 안일한 시도만이 이어져 간 암울한 세월이었던 것이었죠. 제 말이 믿기지 않으면 조선시대 연대기를 한 번 훑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로 등장하는 사건이 멋지고 좋은 사건은 한글 창제 이외에는 하나도 없고, 온통 사화, 왜란, 호란, 혹자의 난으로 얼룩진 역사가 가슴을 답답하게 합니다. 뭔가 경제가 부흥하는 큰 사건이나 정치가 개혁되는 성공한 이벤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시 구한말의 상황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왕이었던 고종의 – 순종도 있었지만 그는 이미 국권을 상실한 나라의 허울뿐인 자였기에 차치하고 – 시대를 섭렵해 봅니다. 그가 집권한 1863년부터 국 권을 완전히 상실한 1910년까지 47년간의 연대표를 보면 정말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답답한 것을 느낄 수가 있죠.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거문도 사건, 동학 농민의 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이 땅에서 그 짧은 시간에 겪어야 했고 결국은 을사조약을 거쳐 한일합방조약에 이르게 됩니다. 그 암울했던 시기에 고종은 뭘 했나요? 대원군은, 민비는 뭘 했나요? 대신들은, 양반들은 뭘 했나요? 경복궁을 중건하는 일이 대원군의 첫 치적(?)이고 고종은 일신의 안녕을 위해 그저 피하고 숨기에 수치심이 없었고, 와중에도 춘천에 피신용 별장을 지으려는 시도를 했었다는 것이 우스울 뿐입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고 국가의 존폐는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데 자신이 무능하면 유능한 관리를 뽑아서 나라를 운영해야 할 텐데 왕이라는 자가 관직을 팔고 있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지요. 고관대작부터 지방 군수에 이르기까지 뇌물을 바치지 않고는 벼슬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관직에 나아간 자들은 원전을 되찾기 위해 온갖 세금을 거둬들이고 착복하기에 여념이 없었답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기아에 시달리면서 백성들이 대의를 생각하고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이었지요. 당장 내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고, 주리는 자식들의 입에 끼니를 이어 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 구한말을 살던 조선 백성의 모습이었답니다.

 

국가를 생각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여유라는 것이 전혀 없었고, 세상이 바뀌어 가는데 대한 자각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요즘 같이 TV가 있지도 않았고, 인터넷도 없었고, 글을 모르니 책을 읽을 수도 없었지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였으나 그나마 언문이라 부르던 글을 읽는 자가 10%도 안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우리 국민의 문맹률이 80%를 하향하게 되는 시점이 1930년이라고 전해집니다. 조선을 이끌고 가던 왕족과 양반들은 자신들의 권좌를 위해 우민화 정책을 심하게 고집한 것이지요.

 

구한말, 중국만 믿으며 1905년 軍 고작 7000명… 결국 亡國...

 

그런데 한반도를 둘러싼 세상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엄청난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왜구로 불렸던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열강들의 강압에 의해 개항을 하면서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게 됩니다. 사실 일본도 마지막 막부였던 에도가 쇄국정책을 고집하였지만 강력한 군사력으로 밀어 부치는 열강들의 힘을 어떻게 할 수 없었지요.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고 다시 천황제로 복귀한 메이지 시대는 그렇게 막을 올리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부동항을 소유하고자 하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중국을 넘어 한반도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답니다. 러시아는 스웨덴령이었던 쌍뜨 페테그부르그와 청나라의 땅이었던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하였지만 만족할 수 없었고 남하정책을 펴게 되었죠. 러시아의 야욕을 알아챈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은 남하 저지에 나서 게 되고 영국은 일본의 힘을 키워 그들을 막고자 하게 됩니다.

 

일본은 이러한 열강의 움직임 속에서 수많은 개화 반대파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실리를 선택하게 됩니다. 일본은 원래 문인보다 무인이 득세하던 나라였고 쇼군이라 칭해지던 자들은 언제나 싸움에 능했고 두려움이 없었죠. 이들의 분출되는 힘을 메이지 천황은 대륙 침탈에 이용하였고 한반도는 그들의 교두보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종이나 정승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였고, 참으로 드물게 세상 물정을 알게 된 수신사, 영선사라고 불리던 자들의 전언에 의거하여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의 한정된 지력으로 바른 판단을 내리고 조선을 지켜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기울어져 가던 청나라는 조선에서 계속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은 군사력을 앞세워 무혈입성하면서 열강들과의 밀약을 통해 잠식해 왔으나 고종의 판단은 러시아라는 가장 흉물스러운 나라를 동아줄로 알고 붙잡아 들어가고 있었죠. 당시 미국이나 영국은 한반도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고, 미국과 일본이 맺은 태프트 가쓰라 조약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은 정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힘이 없었기에 나라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고, 정세를 판단할 지력이 없었기에 최악의 사태를 막아낼 수 없었고, 열강의 군대들이 뚜벅뚜벅 걸어서 한양에 입성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답니다. 민족은 단합하지 못하였고 최후의 순간까 지 나뉘어 싸우고 분열하여 목전의 이익을 지키기에만 여념이 없었고, 일부 지각이 있는 분 들은 그저 자신의 목숨을 끊어 조선 역사의 비참한 순간들과 함께 유명을 달리했던 것입니다.

을사오적

 

조선과 구한말의 역사를 통해 망할 수밖에 없었던 지도층의 무능과 버려진 백성들의 울음 속에서 아무런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조선이 500년 이상을 버텨온 것이 신기하게 느껴집니 다. 국론을 통일시킬 지도자의 노력도 목표도 없었기에 그저 연명하고자 고통받았던 민초들의 삶이 참으로 고단하였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삶을 흥하게 할 아무런 단서를 찾아보기 힘들고, 국가의 폐망 직전까지 왕과 대신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였고 의견의 일치를 찾아볼 수 없었답니다. 맹자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떠 오릅니다. ‘國必自伐而後人伐之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 뒤에 남이 치느니라’

 

조선이 망한 이유를 살펴보면서 현재 우리나라의 사정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가난했던 나라가 이토록 잘 살 게 되었는데 정치는 점점 이 나라를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고, 미래를 향한 희망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국민은 양분되어 서로 싸우며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 잡배들은 선동질로 권좌를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 나라의 향방은 안중에 없어 보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국민들의 지적 수준은 글을 깨우치고, 세계 문물을 접하고 있지만 참으로 바른 판단력을 지니고 높은 가치관을 지니고 사는 자가 드문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합니다.

 

세계 속에서 올바른 행보를 견지하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란 없습니다. 개인의 영달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말고 보다 큰 그림을 그리며 살기 바랍니다. 세계를 여행하며 먹거리 볼거리에만 치중하지 말고 역사를 더듬어 보기 바랍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데는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됩니다. 최근에 가슴 아프게 읽었던 그러나 죽어 있던 체내의 세포가 되살아나는 느낌으로 다가온 이영훈 교수님의 저서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반일 종족주의’ 에필로그의 일부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어느 나라가 전 국민을 몇 사람의 무너가 벌이는 진혼굿으로 동원하는 정신문화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나라에 희망이 있을까요. 어느 나라가 그런 수준의 외교로 일관한다면 격동하는 국제사회에 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반일 종족주의는 이 나라를 다시 한번 망국의 길로 이끌어 갈지 모릅니다. 109년 전 나라를 한 번 망쳐본 민족입니다. 그 민족이 아직도 그 나라가 망한 원인을 알지 못하기에 한번 더 망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헌법에서 '자유'를 삭제하자고 주장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지 않습니까. 절반의 국민이 그들을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망국 예감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그 근원을 이루는 반일 종족주의의 횡포에 대해 이 나라의 정치와 지성이 너무나 무기력하기 때문입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석양에 운다고 합니다. 망국의 예언은 망국의 현실이 한참 진행되고 나서야 들린다는 뜻이겠지요. 더 늦기 전에 우리의 본향 자유를 지켜 내기 위해 일어나서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이 평생을 걸었던 순례의 그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2019년 8월

주사파의 마수가 성성한 날에

 

참고 문헌

매천야록, 황현, 서해문집, 2006

알렌의 일기 (구한말 격동기 비사), H.N. 알렌, 단국대학교출판부, 2017

구한말-일제 강점기, 박윤식 지음, 휘선, 2017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 미래, 2019

우리 역사 속 망국 이야기, 황인희, 백년동안, 2015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량치차오, 글항아리, 2014

징비록, 류성룡, 스타북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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