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사상과 성경
노자의 사상과 성경
얼마 전에 절친한 후배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의 사고가 노자의 사상과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어떻게 통하고 있는지 비교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게 되었습니다.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의 사람이었는데 그는 주(周) 나라 황제가 있던 낙양에서 황실 도서관을 관장하던 고급 관료였습니다. 그야말로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산동성의 노(魯) 나라 곡부의 촌부와는 다른 신분과 명성으로 일찌감치 그 명성을 중원에 떨치고 있었답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마천의 사기열전 (史記列傳)에 기록된 두 사람의 만남입니다. 공자는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노자와 논쟁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낙양까지 긴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공자는 자신의 전공인 예(禮)를 주제로 토론하고자 하였답니다. 공자는 당시 예를 통한 통치 질서의 확립과 귀족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음을 설파하면서 나름의 식견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노자를 만난 공자는 대뜸 예에 대한 노자의 생각을 물었고 노자는 거침없이 답을 했답니다. “귀하가 그토록 강조하는 예를 세워가던 고대의 현자들은 이미 죽어 사라졌다네. 그저 그들이 말한 예의 내용만 남아 있을 뿐이지. 그런데 그대는 왜 이미 지난 시대의 가치를 현세에 다시 펴려고 하나? 나의 생각으론 지식인이란 때를 알아야 해. 시대를 잘 만나 등용의 길이 열린다면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데 힘을 써야겠지만, 시대가 어렵고 불안할 때는 그저 필부로서 삶을 사는 것도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라네. 현명한 상인은 자신의 가장 좋은 물건을 함부로 밖에 내보이지 않고(深藏若虛), 현명한 학자는 자신의 지식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고 바보처럼 살아가는 법이라네(容貌若愚).”
이 말을 들은 공자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고 합니다. 노자는 공자의 예에 대한 공격을 일격에 무너뜨리고 논점을 다른 데로 돌린 것이죠. 첫째, 예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가치라는 것이죠. 둘째, 현자(賢者)는 진퇴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자의 가치관은 상당히 시대와 연관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울러 그의 사상은 허(虛)와 우(愚)로서 대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때가 아니라면 자신을 비우고, 어리석은 것처럼 살아가라는 것이죠. 공자는 그의 인생에서 보듯이 천하를 배회하며 그의 사상을 전하고 벼슬길에 오르려고 하였으나 노나라에서 잠시 임관한 것 외에는 딱히 그를 등용한 자가 없었습니다. 노자는 고위 관직을 누릴 만큼 누렸으니 이와 같이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었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제가 장황하게 공자와 노자의 만남으로 얘기를 시작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자 사상의 수준이 가히 공자가 인정하고, 아니 우러러 본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노자는 말년에 낙양을 떠나 장안이 있는 서쪽으로 가던 중 함곡관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윤희라는 관리의 요청으로 5개월간 머물며 책을 쓰게 되었고, 그 곳에서 공자의 논어(論語)와 쌍벽을 이루는 도덕경(道德經)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이 책은 그의 철학을 고스란히 정리한 것으로 도와 덕에 관해 5천 여자 분량으로 된 책입니다. 집필을 마친 노자는 다시 길을 떠나 아무도 노자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후일 호접몽으로 유명한 장자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죠. 『도덕경』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위는 ‘도는 언제나 인위적으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 못할 일이 없다(道常無爲 而無不爲).’는 뜻을 지니고, 자연은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天法道 道法自然).’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노자의 사상은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입니다.
좋고 나쁨, 크고 작음, 높고 낮음 등의 판단들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비교하여 만들어낸 상대적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로는 도(道)를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죠. 그의 사상의 중심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들어 봄직한 구절이 도덕경의 8장에서 피력되고 있는데 지극한 선은 물과 같은 것으로,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흘러 머무는 특성에 우리의 삶을 비유한 것이죠. 또한 물은 거슬러 오르는 법이 없습니다. 노자는 순리대로 흐르는 대로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을 강조한 것이지요.
그런데 과연 우리의 삶이 언제나 이렇게 되나요? 때로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힘써 버티기도 하고, 자신의 힘으로 버거운 일에도 도전하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인생의 묘미가 아니던가요? 제가 여기서 노자의 사상을 반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고민해 보고, 무조건 그렇구나 하기보다는 숙고하여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발전을 위해 옳다고 느끼기에 후학들에게도 이러한 습관을 길러 주기 위해 글을 쓰는 만큼, 이의를 제기해 보는 것입니다. 당연히 노자는 중국의 사상가로서 공자와 필적하는 최고봉에 있었던 분이고 그의 사상은 지금도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력은 제가 권하는 방법을 거듭할 때 길러지는 것이지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기만 하여서는 제자리를 맴돌 뿐입니다.
각설하고 성경의 말씀에서 노자의 사상과 비교하여 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은 지극한 선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선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을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4:12, 잠언 16:25) 라고 두 번에 걸쳐 밝히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면 누구나 대략 선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한 것 같지만, 인간은 지극한 선에 이른 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대략 상대적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것이지 극상의 선함을 유지하는 삶을 살 수 없고, 그 삶에서 단 하나의 오점이나 죄를 발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낸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 밖에 없으셨지요.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 분은 참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인간은 자신의 인격의 연마를 통해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마음속을 스쳐가는 생각이나 말로도 죄를 짓게 되는 것이랍니다. 시기, 질투, 교만, 탐식, 탐욕, 탐색, 허언, 나태, 불의, 불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삶을 인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이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7장 1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회개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물처럼 낮은 대로 임하라는 겸손의 교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함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 낮은대로 임한 자를 도와주시고, 일으켜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이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자가 말씀하는 침잠(沈潛) -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게 물속 깊숙이 가라앉거나 숨음 - 의 의미와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노자는 도덕경 8장에서 ‘물’에서 겸손함 (居善地)과 더불어 많은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연못처럼 깊은 마음(心善淵), 차별없는 마음(與善仁), 방향을 잡는 말에서의 믿음(言善信), 구악의 척결 (正善治), 일의 다양한 능력(事善能), 움직임의 때를 아는 것(動善時)을 물을 통해 배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노자는 자연에서 진리를 찾는 분답게 물에서 많은 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물은 어떤 자리로 매김하고 있을까요?
성경에서도 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시나요? 저는 세상을 심판한 큰 물이 가장 먼저 떠 오릅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과 뗄 수 없는 큰 홍수를 야기한 그 물이 먼저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물을 사용하셨죠. 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의 수단인 동시에 심판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없서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인간이 지녔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 그리고 생명마저도 거두워 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면 무서운 심판의 의미로서만 ‘물’이 존재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언제나 물은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우리에게 쉼을 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저에게도 가장 큰 위로가 된 성경 구정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 다음에 들려주시는 말씀은 2절과 3절에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입니다. 성경의 수 많은 구절에서 물은 우리 인간에게 휴식을 주고,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구원해 주시는 주님)로 또 우리의 주인으로 마음에 영접하고 입으로 고백하면 무엇을 합니까? 물로써 세례를 받게 되지요. 물은 우리의 죄악을 씻어주고 우리의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물론 성경은 그 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신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고 완전한 삶으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자가 깨우친 물의 의미가 성경에서 지니는 세 가지 의미를 통해 좀 더 새롭고 확실해지는 느낌이 있지 않나요?
사실 저의 짧은 식견과 짧은 글을 통해 노자의 사상을 논하고 성경의 말씀을 상고한다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노자가 자신의 삶을 통해 깨우쳤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무위자연의 사상을 통해 내려놓음을 삶의 가치로 붙잡고자 하던 모습이 저의 후배의 모습에서 연상되어 한 구절 써 내려 보았습니다.
분명 노자의 도덕경은 매력적인 책이고 지금 읽어 봐도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뭔가 모를 안식의 기쁨이 찾아오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는 그 순간 밀려오는 허무감에 몸부림을 치는 것이 본연의 모습이고, 우리는 다 내려 놓음으로 인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기 위해 이 땅에 온 것도 아닙니다. 만일 다 비우고 바람처럼 물처럼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의 어떠한 노력도 다 헛될 뿐일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는 우리는 우리의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하고 의미를 더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노자는‘대음희성 대상무형(大音希聲 大象無形)’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큰 소리는 귀로 들리지 않고, 정말 큰 모습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만큼 크신 분이시므로 우리는 그를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큰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무도 크고 아름다우신 그의 음성을 날마다 지금도 들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우리의 삶에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이나 마음속에 가득 찬 욕망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빈 마음에 하나님을 채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헛된 욕망을 비워낸 그 곳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 넣고, 언제나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노자의 사상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기 위한 길잡이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샬롬
2018. 7.4.
샘골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