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강병의 신화 박정희 대통령
일생을 조국과 민족에게 바친 대통령 박정희!
그에 관해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하니 참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사실 현세대의 일부가 그분의 행적에 침을 뱉 고, 심지어 죄 없는 그의 영애마저 거대한 거짓의 산을 만들어 파묻어 버린 현실을 마주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에게 자괴감 마저 든다. 5•16 혁명을 통해 다시금 폭망해 가던 나라를 구하고 세계 최빈국의 지위에서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르는 반석을 다져내신 그분이 행하신 기적을 마주하며 그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이들이 적고, 그를 독재자의 프레임을 씌워 폄훼하는 자들에게 적절한 평가를 뺏기고 있음은 개탄할 일이다.
오직 대한민국의 자유와 경제발전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그의 마지막 순간은 영예로운 퇴진이 아니라 부하의 흉탄에 시해당하고 말았음이 가슴을 사무치게 한다. 그의 사랑하던 아내는 북한의 간첩 문재광이란 자가 대통령을 암살하려던 오발탄에 의해 비운을 맞고, 자유 우파의 괴멸을 온몸으로 막아내던 그의 장녀는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있다. 참으로 그의 행적을 논하기 전에 그의 조국(祖國)을 위한 충정과 헌신에 대한 보상이 너무도 열악하기 그지없어 먹먹한 마음에 이 나라가 천벌을 받고도 모자람이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국익이나 대의를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자리에 연연하는 행보를 이어감으로 인해 참으로 가치 있는,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정쟁(政爭)에 모든 힘을 소모해 버리고 마는 세월들을 보내온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생전에 '내 일생(一生)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좌우명으로 세계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치적을 이루어내신 것이다. 그의 권좌를 시기하고 찬탈하려는 자들을 향해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라고 하시며 자신의 소신있는 행동이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가를 함축하시었고 그가 옳았음이 증명되고 있다.
참으로 일천한 나의 글이 그의 치적을 적절하게 요약하지 못하더라도 이 글을 통해 후학들이 그를 바라보는 바른 시각을 가지고 나아가 올바른 역사관과 바람직한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본다. 그에게 씌워진 올가미는 군사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는 것과 18년이라는 장기집권을 통해 독재를 했다는 것인데 그로 인함이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냐는 것으로 상쇄될 수는 없을까? 단순히 반문해 보고자 한다. 4.19 학생운동에 의해 이승만 대통령이 자진 하야하시고 정국은 그야말로 소용돌이 속에서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북한은 그 힘을 축적하며 적화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배들은 자신의 권력투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깟 국회의원 자리가 뭔지, 존경도 치적도 없는 장관자리, 대통령 자리가 뭣이간데 그토록 의미 없는 정쟁으로 국력을 허비하는지 이 나라는 그 때나 지금이나 참으로 free lunch에 목메는 정치 잡배들의 행각이 역겹다.
각설하고 그러한 정국을 타개하고 나온 것이 박정희 장군이었고, 그는 이후 계엄 사령관에서 국가 재건 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63년 12월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1960년대 초는 생존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의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며 극도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1963년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은 알다시피 북한보다도 못살았고, 필리핀으로부터도 원조를 받는 실정이었다. 지금도 우리가 사먹는 가나 초콜릿에 관한 일화가 참 믿기 어렵지만 당시 가나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고 경제 수준이 비슷한 한국에 자국에 넘쳐나는 카카오를 가져다가 이거라도 먹으라는 제의로 인해 초콜릿이 만들어졌다는 웃지 못할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1962년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80불에 지나지 않았고 절대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나라가 50여 년 만에 GNI 3만 불, 경제 규모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이 너무나 신기하지 않은가? 한 사람이, 한 가정이 빈곤을 벗어나 부유함을 누리기가 흔치 않은 일인데 국가가, 그것도 아무런 지하자원이나 생산기반이 없던 수천만 명의 인구를 지닌 국가가 강대국으로 변모한 사실은 세계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초석을 다지고, 그토록 어리석고 문맹률이 95% 에 달하던 이 민족을 20% 문맹률로 탈바꿈시켜 지하자원은 없지만 뭔가 해볼 수 있는 국민으로 바꾸어 놓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손톱만큼도 부리지 않고 이 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고, 북한 공산정권으로부터 위협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국력신장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1960년대 초 서울의 청계천
1960년대 초 가을 장날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을 모두 열거하기가 단순히 몇 장의 글로 함축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지마는 우선 경제 정책의 통해 이 나라의 극빈 상황이 어떻게 부유한 나라로 탈바꿈하게 되었는지 살펴 보자.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게 된다. 경제 성장을 위하여 1962년부터 1981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단계별 목표와 성과를 잠시 살펴보자.
1960년대 초 울산의 모습
제1·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71)
이 시기는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루에 단돈 1불(천 원)도 쓰지 못하는 극빈국에서 무엇으로 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현재 세계 최빈국으로 있는 아프리카의 부룬디나 브루키나 파소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산업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러나 경공업을 육성하고 수출 주도형 성장 전략으로 가발, 섬유 산업 등 낮은 임금을 이용한 노동 집약적 산업을 중심적으로 발달시켰다. 사회 간접 자본 확충 노력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1970), 포항제철 건설을 시작하였다.
향후 고속도로의 건설은 산업 유통망으로서, 제철 산업은 중공업 육성의 초석으로서 역할을 당당히 담당하였 다. 제철업이 없이는 자동차도 조선도 플랜트 사업도 모두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당시 야당의 대표 격이던 김영삼이나 김대중과 같은 자들은 산업의 발전 방향이나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속도로는 가진 자들이 놀러 다니는 길이라고 반대하며 건설 현장에서 드러누워 농성을 하였다고 한다.
여기 바닥에 누워서 반대를 하던 두 사람은 누구일까요?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자원 없음을 한탄하지 않고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고심하던 중 해외 차관도 안 되고 민족 자본도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1965년 5억 달러라는 보상금과 3억 불의 차관을 받았고, 이를 통해 경부 고속도로와 포철, 소양강댐 등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의 상환 능력을 인재의 공급으로 담보하여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게 된다. 아울러 이 기간 우리나라의 특수가 발생한 것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러한 대내외의 노력에 힘입어 빠른 경제 성장과 수출증대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1972년 일인당 국민소득은 320불을 기록함으로 10년 만에 4배의 성장을 이룩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의 박태준 회장과 함께 용광로의 불을 지피고 있다
그 암울한 상황에서 굴하지 않고 나라의 부를 쌓아 북한의 남침 야욕을 막겠다는 일념 하나로 민족 혼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우리가 잘 아는 새마을 운동을 1970년대에 시작하게 된다. 이제는 민속촌에서 나 볼 수 있는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고, 흙먼지 자욱한 좁아터진 마을길을 넓히는 과정에서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라는 기치 아래 패배주의에 물들어 행동하지 못하고 입만 살아 있던 이 민족이 근면하고 자주 자립할 수 있는 국민으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태껏 경험할 수 없었던 선진화의 물결에 올라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성 싶다.
쇄국정책과 우민화 정책 아래 사리분별력이 현저히 하향 평준화 되어 있던 이 민족이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 보국과 박정희 대통령의 부국강병 정책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새마을 운동은 단순히 주거 환경 개선의 차원을 넘어 민족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정신 운동으로 승화되었고, 지금도 세계의 수많은 국가에서 이를 배우고 적용하여 국가 근대화의 롤모델로 삼고 있다.
우간다에서 벌이는 새마을 운동
구미국가 산업공단
경부고속도로의 개통 – 민족의 오랜 꿈이 실현, 자립과 영광 곧 닥쳐올터
제3·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72~1981)
이 시기는 재벌 중심으로 수출 주도형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였고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 위기(1970년대 초)를 건설업의 중동 진출 등으로 극복하였다. 그 결과 중화학 공업의 생산이 경공업 생산 보다 많아지면서 산업 구조의 고도화가 이루어졌다. 중소기업 진흥 정책도 추진되었으나 재벌 중심의 성장 전략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혹자들은 재벌에게 일을 밀어주고 자본의 집적을 낳았다고도 평가하지만 산업 구조의 고도화를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그의 이러한 정책적 결단이 없었다면 이 나라에는 삼성이라는 세계 초일류 기업도 존재할 수 없었고 현대나 LG, 대우, 두산중공업과 같은 세계적 브랜드를 만들어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기업의 브랜드는 한 나라의 가치를 대변한다. 강대국들의 이미지는 기업의 브랜드로 인해 형상화되고 그 나라의 신용등급이 좌지우지 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약소국들이 우리가 들어보거나 알만한 기업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찬찬히 우리가 아는 브랜드를 상기시켜 보기 바란다.
여수석유화학단지
울산 현대 자동차 공단
거제조선소
울산 석유 화학공단, 여수 석유 화학 공단, 창원기계공단, 울산 조선 자동차 공단, 온산 비철금속 공단, 거제 조선 공단, 구미 전자 공단, 이 모든 것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경공업이나 중소기업 육성에 치중하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감히 어떤 개발도상국의 국가도 흉내 내지 못하는 실로 엄청난 일을 해 낸 것이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나 멕시코도 못하는 석유 정제 산업을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가 세계 석유 수출국으로 자리매김하고 2019년 현재 세계 석유 정제 능력 5위에 랭크될 정도로 대단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물론 이를 통해 화학 섬유나 플라스틱 제품 등의 석유 관련 제품의 생산과 수출이 산업 전반에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하자원이 열악하고 내수 시장의 규모가 작은 한국의 특성상 무역 입국의 기치를 내걸고 매진한 것은 이 나라의 명운을 달리하는 큰 획이 되었지요. 1962년 5,400만 불에 남짓하던 수출을 1964년 1억 불을 돌파하고 1971년 10억 불, 1979년 150억 불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추세가 이어져 2018년 현재 우리나라는 6천억 불의 수출을 기록함으로 세계 6위의 수출대국이 된 것이다. 1962년에서 1979년에 이르기까지 연평균 30%를 상회하는 수출의 증가세는 세계 어디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가 전무후무한 것이다.
수출액 증가 그래프 (1949 ~ 1979)
간략하게 살펴본 역사의 한 줄기에서 그의 성공이 이 나라의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느껴지는가? 현세대를 살아가는 아마 80년도 이후의 출생자들은 이 나라의 암울했던 못사는 나라의 설움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눈이 있다면 과거의 사진 몇 장이라도 들춰보기 바란다. 조선말의 왜소하고 더럽기가 짝이 없는 선 조들의 모습들, 6.25 사변을 통해 잿더미가 되어버린 이 나라의 비참함에서 어떻게 이런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는 나라가 되었을까?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 대국은 어떻게 이루진 것일까? 질문해 보고 답을 찾노라면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가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개발도상국가들은 스스로 일어날 동력을 찾지 못하고 주저앉아 세월을 보낸다. 그런데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일부 정치배들의 농간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역시 주저앉고 만다. 가까운 예로 1965년 우리나라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이 나라의 기틀을 탈바꿈 시켜 가고 있을 때 더 많은 보상금을 받았던 필리핀이나 베트 남, 인도네시아, 미얀마는 어떻게 되었는가? 국가의 근대화 작업을 시작하는 듯하였으나 대부분의 자금이 정치배들의 착복으로 이어 지고 여전히 못사는 나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는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월남전에 얽힌 얘기를 하나 하자. 월남전에서 용맹하게 싸워 전적을 올린 한국군에게 감사하여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뭔가 선물을 하고자 하였단다. 그때 박대통령은 과학기술연구소의 설립을 요청하여 KIST가 설립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먹을 것도 부족한 상황에서 국가의 백년대계를 내다보며 기술 입국의 준비를 한 그의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 후 한국 과학원과 대덕연구단지, 기업형 전문 연구소의 설치를 독려하였다. 그는 경제 개발뿐만 아니라 기술 인력의 양성을 위해 국가 기술 자격제도를 만들어 기능사를 양성하고 국제 기능올림픽을 제패하도록 함으로 나라의 근간을 바꾸어 나갔다.
또한 중동에 수많은 건설 현장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외화를 벌어들이고 외교의 다변화를 이룩하였다. 4대 강에 다목적 댐을 건설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에너지의 자력 충당을 이룩하고, 식목일을 제정하여 치산 녹화 사업으로 벌거벗은 국토를 푸르게 가꾸고, 그린벨트를 지정하여 난개발을 막았다. 혼분식을 장려하고 영농의 과학화를 통해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었다.
당시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두서의 성적을 거둔 기능사들의 카 퍼레이드
국토종합 개발계획을 통해 간척 사업과 아산만과 삽교천 방조제를 건설하고 서울에는 지하철 1호선을 개통시켰다.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고 가정의례준칙을 시행하여 허례허식과 문맹에 찌든 의식을 개혁하고 정신혁명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북한 간첩이 이 땅에 발 붙이지 못하도록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하였고, 선진국에서 나 행하는 부가가치세를 도입하여 국세의 안정화를 기하였다. 안정화 되어 가는 경제의 발판 아래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율곡사업을 통해 군의 현대화를 이룩하였다.
미국 존슨대통령을 예방한 박정희 대통령의 워싱턴 D.C. 카 퍼레이드 환영행사
필자가 기억하는 대략의 그의 치적이 이러하다. 경제, 사회, 문화, 안보, 외교의 행보가 도저히 한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는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였다고 한다. 모르는 것은 묻고 공부하면서 최적의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고민하였고 그의 보좌진들도 그의 충정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던 것이다. 그는 진실하였고 오직 이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사심 없이 자신을 던졌다. 이런 그를 두고 독재자라는 올가미를 씌워 폄훼하려 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그가 서거한 후 수많은 자들이 그의 사재가 어딘가에 은닉되어 있을 거라고 하며 혈안이 되어 찾아 나섰지만 그가 떠난 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푼의 더러운 돈이 나온 것이 없다. 이를 두고 좌경화된 인간들은 그가 더 살았으면 분명 착복하였을 거라는 가정을 일삼는 것을 보며 영혼의 병듬이 인간을 어디까지 추락시키는가 하는 연민지정을 느낀 적도 있다. 그는 민족을 위해 일하면서 그토록 청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전체가 그가 빚어 놓은 걸작품으로 변모하고 있었기에 천한 자본의 은닉 같은 것에는 아마도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이기도 하다.
글을 맺으면서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이 쓴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사람은 '비상대권'을 내세워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자신을 반대하는 수백 개의 신문을 폐간시키고 모든 통신에 대해 검열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반(反) 국가 행위자는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공포(公布)하고 군인이 민간인 반대자를 체포하도록 허용했다. 수많은 사람을 영장 없이 군교도소에 투옥했다. 이 정도면 독재자로 여기기에 충분한 사람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그의 조국에서는 공식적으로 거의 성자(聖者)로 대접받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위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의 이름은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위대한 노예해방자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연설)를 갈파한 사람을 어찌 감히 독재자라 할 것인가? 그러나 링컨은 그 기념비적인 연설 이전에 '영장 없는 구금(拘禁)을 위하여 이미 수 차례에 걸쳐 몇 개 주(州)를 대상으로 '인신보호 영장제도(habeas corpus)'의 유보 조치를 취했다. 1862년 9월 24일에는 전국적으로도 정말 정지시켰다.
미국의 경제사학자 토머스 J. 디로렌조 (Thomas J. DiLorenzo)에 따르면 링컨의 통치기간 중 그렇게 투옥된 사람이 1만 3000여 명에 이른다. 남북전쟁 중이었다고 하지만 가히 철권통치였다. 링컨의 이 같은 철권통치는 언론인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북전쟁 막바지 무렵인 1864년 5월 18일, 링컨은 뉴욕시 군사령관에게 명령 하나를 하달했다. 자신의 노선에 계속 딴지를 거는 뉴욕의 두 신문을 폐간시키고 그 발행인, 편집장을 체포하여 군사재판에 회부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미국에선 민주주의의 성자로 추앙받고 있다. 워싱턴 DC에는 웅장한 링컨 기념관이 있다. 그 정면 한복판에 자리한 높이 6m에 육박하는 그의 좌상은 광장을 굽어보고 있다. 그 광장은 미국 민주주의의 성지가 돼 있다.
그 비슷한 사람이 있다. 그도 '긴급조치'를 시행하여 그의 정책에 맞서는 행위를 하는 자들을 단속했다. 그런데 그의 긴급조치로 처벌받은 수는 1,000여 명, 링컨의 조치로 투옥된 수의 10분의 1이 안 된다. 그러나 링컨과 달리 이 사람은 그의 나라에서 그냥 '독재자'로 치부되곤 한다. 업적은 없이 그저 철권만 휘둘러 댔기에? 아니 다. 표현이 그럴 뿐 그의 철권은 링컨의 그것에 매우 못 미친다. 더욱이 그의 업적은 위대할 뿐만 아니라 경이적이다. 그래서 그의 업적은 '기적'이라 불린다. 세계적으로 그렇다. 그럼에도 그 자신의 나라에선 폄훼되기 일쑤인 그의 이름은 박정희다.
박정희에 대한 세계적 평가는 매우 높다. 세계 유수의 석학과 정치 지도자들은 그의 경이적인 업적을 하나같이 극찬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말을 빌려 요약하자면 한마디로 "박정희가 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가 그 기적을 선사한 이 나라에선 정반대의 언설(言說)이 횡행한다. 박정희 시대, 그 위대한 질주에도 불구하고 내내 민주의 깃발을 흔들어대며 맞섰던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늘 박정희를 욕했다. 그리고 지금, 언젠가부터 '민주팔이'의 시대가 되고 그에 더해 '붉은 민주팔이'의 시대가 된 지금, 이 세력들은 아예 박정희 시대 전체를 적폐(積弊)라고까지 하고 있다. 이들의 이 같은 언동은 단지 박정희를 이해 못해서만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 고의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그의 시대를 능멸하고 있다.』
우리는 하늘 아래 어떠한 사람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모든 이에게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다. 공(功)이 현저히 크고 그 중심된 생각과 행동이 모두에게 유익을 끼친 것이 지대하다면 우리는 그를 일부의 과오를 지적하며 폄훼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를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가 천 부 인권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면, 그토록 힘들게 얻은 자유를 지켜 누리고 살게 하는 데는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 이 두 분의 바르고 확고한 신념과 통찰력과 예지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보아 왔다. 세계의 독재자들이 얼마나 자신의 호사를 위해 국민을 탄압하고, 권좌에서 쫓겨났을 때 얼마나 많은 은닉 재산이 발견되었는지를. 지금도 북한의 독재자는 굶주려 아사(餓死)하는 국민들을 뒤로한 채 얼마나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지를. 박정희 대통령을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하고 추앙할 것인지 종북세력들의 프레임에 걸려 폄하할 것인지는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지력(智力)과 이성(理性)에 남겨 둔다.
참고 문헌
국가와 혁명과 나, 박정희, 기파랑, 2017
(광복 70년 대한민국의 위대한 만남) 박정희와 박태준, 이대환, 아 시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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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와 중동건설. 1, 정성화, 선인, 2014
박정희, 압축 민주화로 이끌다 : 경제학 제국주의자의 한국경제론, 김인규, 기파랑, 2014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 : 민족주의와 발전, 김보현, 갈무리, 2006
박정희가 옳았다 : 5.16과 10월 유신의 정치경제학, 이강호, 기파랑, 2019
탄생 100주년으로 돌아보는 박정희 100장면, 문갑식, 김성동, 오동룡, 배진영, 이상흔, 조선뉴스프레스, 2017 박정희 새로 보기 (오늘에 되살릴 7가지 성공모델), 이영훈, 김광동, 남정욱, 김용삼, 전상인, 이승수, 황인희, 윤주진, 기파랑, 2017
박정희 바로 보기 : 우리가 알아야 할 9가지 진실, 송복, 김인영, 여명, 조우석, 유광호, 기파랑,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