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국전쟁'을 보고
지난주부터 별러오던 영화를 오늘 짬을 내서 봤어요. 이토록 영화를 마음먹고 본 것이 오랜만인 것 같았는데 반드시 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앞섰지만 그 내용이 대략 아는 것이라서 꼭 봐야 하나 하는 귀차니즘이 발동하기도 했죠. 하지만 일주일이면 막을 내릴 줄 알았던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일을 계속 연장하며 4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고 있다는데 꼭 봐야겠구나 싶었죠. (글을 올리는 지금은 100만 명을 넘어섰어요)
영화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모습을 임팩트 있게 비교하면서 시작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꿈꾸던 나라가 이루어졌음을 명료하게 설명하며 시작되었어요. 위성사진이 제공하는 남북의 야간 불빛과 발전된 선진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서울의 아름다운 모습과 대비되는 북한의 무자유하고 전쟁광적인 획일화된 모습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자유 대한민국의 모습이 얼마나 감사한 지 가슴을 두드렸어요. 그리고 그 자유 대한의 모습에는 해방 후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농지개혁의 성공이 이 나라를 공산집단의 침공으로부터 막아내고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초석이 되었음을 선포하였어요.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와 건국과정의 주요 사건들과 국제 정세의 급변하는 모습들이 교차되면서 해방 이후 이 나라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워지기 위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각고의 노력이 있었는지를 매우 빠른 템포로 담고 있어요. 사실 나라를 팔아 먹던 고종의 구한말로부터 시작해서 36년간의 식민지 기간 동안의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북괴의 공산주의를 앞세운 전제주의 독재왕국에 맞서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건립의 숨 막히는 3년의 과정과 6.25 사변을 겪으며 나라를 지켜내고 세계 최강국으로 떠오르는 미국과의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이 땅의 안위와 발전을 담보한 5년여의 시간을 통틀어 최소 50여 년을 1시간 50여 분에 녹여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덕영 감독은 3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 다큐멘터리를 위해 바쳤고, 한국 근현대사를 바른 시각으로 밀도 있게 전하시는 이호 목사님과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장이신 유석춘 박사의 고증과 각계 각층의 증언과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본 영화가 일방적 주장이나 왜곡된 역사물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두 명의 일본계 하와이 호놀룰루 시의원을 지낸 분들이 증언하는 이승만의 인격과 업적은 피아를 넘어 역사의 바른 평가를 제공하는 그들 앞에 끝까지 좌파에 의해 공산주의 철천지 원수로서 폄훼당해야 했던 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편파적인 왜곡을 거듭해 왔는지를 항변하는 단편이 되기도 했답니다.
또한 짧은 시간을 통해 그에 대한 악마적 거짓말인 몇 가지 부분을 항변하는 것 또한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이었던 같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남북분단의 괴수이고 미국의 앞잡이였다고 폄훼하죠. 그러나 그의 정읍 연설을 통한 UN의 감시하에 국민투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실시는 38선 이북이 이미 1948년 9월부터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공산화 작업이 진행된 사실과 그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음을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또한 그를 가리켜 6.25사변이 터지자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자라고 폄훼하는 자들을 향해 망명 정부를 권하는 미국에 맞서 끝까지 이 나라를 수호하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팩트로 거짓을 바로 잡고 있어요. 대동강의 끊어진 다리를 기어 올라 피난하던 모습을 이승만 정부가 혼자 살려고 한강 철교를 끊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이었고, 부표를 통해 안전하게 피난하는 모습을 전해주기고 하였어요.
사실 초대 대통령으로 91%가 넘는 지지를 득하고 당선되어 3대까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오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의 길을 가야했던 사건은 3.15 부정 선거였죠. 하지만 그 사건은 자유당이 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힘들었던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자행했던 일이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워낙 우세에 있었고, 더구나 경쟁자였던 조병옥의 지병으로 인한 사망으로 무투표 당선이 확정되었었죠. 그런데 자유당의 부통령 선거 부정으로 인해 학생들의 의거가 일어났고 경찰의 발포로 상황은 악화되었어요. 이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결심하고 자신의 사저로 퇴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휴식을 위해 2주간의 계획으로 하와이로 떠났는데 악의적 언론 보도로 인해 그는 다시 생전에 그토록 그리워하고 일생을 바쳐 다시 찾아낸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1965년 7월 19일 이역만리에서 천국으로 옮겨갔던 것입니다.
이승만, 그가 꿈꿔왔던 성경의 진리 아래 세우고자 했던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가 있는 나라, 기독교적 입국을 원했던 그이 꿈은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졌으나 6.25 사변을 통해 다시 대한민국은 멸망의 위기를 맞았으나 미국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방어에 성공하였죠. 지리한 전쟁의 참화 가운데 미국 국민들은 종전을 원했고. 종전을 선거 캠페인으로 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휴전 협정을 몰아붙였어요. 그러나 그 당시 휴전을 하고 미군이 떠나고 나면 다시 북괴의 도발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상호 방위조약을 이끌어 내고, 미군의 주둔과 8억 불의 원조도 받아요. 참으로 우리 대한민국에 이러한 분이 없었다면 지금 이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 확신해요.
4.19 학생의거의 부상자를 병문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진심 어린 모습에서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답니다. 4.19 의거를 향한 그의 평가가 "청년들이 정신이 깨어 있으니 이 나라가 살겠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동영상을 통해 다가서니 얼마나 가슴에 사묻치던지요. 인고의 모진 세월을 다 견뎌내고, 연인원 175만 명을 보내서 이 가난한 나를 지켜주었던 미국은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하여 예우합니다. 뉴욕의 영웅의 거리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카퍼레이드를 하던 영상에서 환호하던 미국인들은 자유를 위해 함께 목숨을 아끼지 않은 위대한 용사 이승만을 향해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의 업적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고인이 되신 그 분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가 세우고 일으킨 이 나라를 후손들에게 반듯하게 물려주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 영속할 수 있도록 일조하는 것이 그의 충심에 보답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도 그의 쓸쓸하다 못해 배신감으로 사무칠 말년의 병상의 모습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그토록 원했던 조국의 땅을 뒤로한 채 천국으로 옮겨가신 그의 모습에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제발 이 나라 국민들이 공산주의자들의 마수에서 벗어나 역사를 바로 알고 감사할 분에게 감사할 줄 아는 바르고 건강한 시민의 모습이 되길 바라며, 그의 영전에 뜨거운 감사를 올립니다. 조만간 그의 국립묘지에 헌화라도 해야겠습니다.
2024. 2.27.
국부 이승만 대통령께 감사드리며